문순득은 조선 후기의 평범한 홍어장수였지만, 운명적인 표류 경험을 통해 조선 최초의 필리핀어 통역사가 되었습니다. 그의 여정은 단순한 모험을 넘어 정약전과의 만남으로 이어져, 조선의 지식 확장에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이 글에서는 문순득의 놀라운 경험과 정약전과의 교류, 그리고 그들의 만남이 조선 사회에 미친 영향을 살펴봅니다.
문순득의 예상치 못한 여정은 1801년 12월, 평범한 홍어 구매 여행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전라남도 신안군 우이도(牛耳島)에 살던 그는 흑산도 근처에서 홍어를 사 돌아오던 중 갑작스러운 풍랑을 만났습니다. 이 사건은 그의 인생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습니다.
폭풍우가 지나간 후, 문순득은 자신이 일본의 오키나와, 당시 유구국(琉球國)이라 불리던 곳에 도착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곳에서 그는 8개월간 머물며 현지 언어를 배우고 문화를 체험했습니다. 유구국 사람들의 친절한 대접 덕분에 문순득은 새로운 환경에 적응할 수 있었고, 이는 그의 후속 여정에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1802년 10월, 문순득은 유구국에서 중국으로 가는 조공선에 승선했습니다. 그러나 운명은 그에게 또 다른 시련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중국으로 가는 도중 다시 한 번 풍랑을 만나 필리핀, 당시 여송국(呂宋國)이라 불리던 곳으로 표류하게 된 것입니다. 이곳에서 문순득은 9개월간 머물며 현지 언어를 습득했습니다.
문순득의 여정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는 여송에서 상선을 타고 마카오에 도착한 후, 난징과 베이징을 거쳐 1804년 12월에 조선의 한양에 도착했습니다. 마침내 1805년 1월, 그는 3년 2개월 만에 고향인 우이도로 돌아왔습니다.
고향에 돌아온 문순득은 다시 홍어 장사를 시작했습니다. 그러던 중 그는 흑산도에서 유배 중이던 정약전(丁若銓)을 만나게 됩니다. 이 만남은 문순득의 경험이 단순한 개인사를 넘어 조선의 지식 확장에 기여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정약전은 문순득의 표류 경험에 큰 관심을 보였습니다. 그는 문순득이 구술한 내용을 바탕으로 <표해시말>(漂海始末)이라는 책을 저술했습니다. 이 책은 문순득이 경험한 유구국, 여송국, 마카오 등의 지리, 문화, 풍습을 상세히 기록하고 있어, 당시 조선인들에게 외부 세계에 대한 귀중한 정보를 제공했습니다.
문순득의 경험은 정약전의 동생인 정약용에게도 전해졌습니다. 정약용은 문순득이 전한 여송국의 화폐 시스템에 관심을 가졌고, 이를 바탕으로 <경세유표>에서 조선의 화폐 개혁안을 제안하게 됩니다. 이는 문순득의 경험이 단순한 모험담을 넘어 조선의 정책에까지 영향을 미쳤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입니다.
문순득의 능력은 실제 상황에서도 빛을 발했습니다. 1801년 제주도에 표착한 5명의 외국인의 출신을 알아내지 못해 9년간 곤란을 겪고 있던 조선 조정은 문순득의 도움으로 그들이 여송국 사람임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이로 인해 그들은 마침내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고, 문순득은 그의 공로를 인정받아 종2품 가선대부의 벼슬을 받았습니다.
문순득의 이야기는 19세기 조선의 폐쇄적인 상황에서 우연한 기회로 세계를 경험하고, 그 지식을 조국에 전한 평범한 상인의 비범한 여정을 보여줍니다. 그의 경험은 정약전, 정약용과 같은 당대 지식인들과의 교류를 통해 더욱 가치 있는 지식으로 승화되었습니다.
오늘날 문순득의 이야기는 여러 방식으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전남 목포의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에서는 "홍어장수 문순득, 아시아를 눈에 담다"라는 주제로 특별 기획전을 열었고, 그의 고향인 전남 신안군 우이도 우이도항에는 문순득의 동상이 세워져 있습니다.
문순득과 정약전의 만남은 조선 후기 지식의 교류와 확장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입니다. 평범한 상인의 우연한 경험이 당대 최고의 지식인들과 만나 새로운 지식을 창출하고, 나아가 조선의 정책에까지 영향을 미친 이 이야기는 오늘날에도 많은 시사점을 줍니다.
우리는 이를 통해 개방적인 태도와 지식의 공유가 얼마나 중요한지, 그리고 예상치 못한 경험이 어떻게 큰 가치를 만들어낼 수 있는지를 배울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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